저는 스물 네살을 살아가고 있지만 아버님의 스물 네살을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때는 삼십 년전이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군대는 길고 험했고 당신은 외로운 이십대를 표류하고 있었을겝니다. 다만, 당신만을 알고 사시던 키 작은 어머니와, 먹먹한 가슴 속 어딘가에서도 빛을 내며 맥동하는 희망이 당신을 살게 했을겁니다.
훈련소에서 경계근무를 처음 서며 당신을 느꼈습니다. 그 차갑고 막연한 공간 속에서 나는 시대를 뛰어넘어 당신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나는, 소년이었지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무엇을 지키면서 당신과 같은 남자가 되었습니다. 스물 세의 나이로, 그것은 감당하기 쉬웠지만 아버지로서의 삶의 무게에 짓눌린 당신의, 입영일에 보여준 멀고 희미한 눈물까지 감당하기는 참 힘겨웠습니다.
적을 마주하고 선 이 서늘한 땅에서, 제대를 100여일 앞두고 당신을 그려봅니다. 편하고 쉽기만 했던 세상이 이젠 낯설고도 어렵게 보입니다. 삼십년전,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고 나와 같은 모습이었을겁니다. 세상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남부럽지 않은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을 일궈낸 당신께 끊임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것은, 세상을 경영하는 일과 견주어도 결코 수월하다고 할 수 없을 일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에게 쏟은 정성을 오로지 일에 쏟았더라면 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의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고 있고, 당신의 아내는 늙지않고 미소지으며 살아가고, 당신의 아들은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당신의 딸은 큰 뜻을 품고 타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오래 남지는 않겠지만 당신이 뿌리고 거둔 행복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이 당신이기에 사랑합니다.
철이 들었다고는 않겠습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제 그릇은 너무 작습니다. 이제 약관의 티를 벗었을 뿐 당신의 그림자조차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내가 아는 형은 당신의 미소속에서 무서움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고수는 자신의 내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지요. 나는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아직도 그렇게 말이 많나봅니다. 그러나 아버지, 나는 당신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 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영원히 부끄러운채로, 유신의 아들 원술처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께 인정받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 무엇이나 할 수 있을까요. 다만 아직 시간이 많음을 위안삼을 따름입니다.
좁은 책상앞에 앉아 한줄기 펜으로 당신의 모습을 그리려 하니 노트가 참 작게 느껴집니다. 당신께도, 어머니에게 만큼이나 자주 편지를 스고 싶었지만, 아들에게 아버지는 참 어려운 존재입니다. 이위소 박사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자주 편지하는 아들이 되고 싶지만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은 깊고 아들의 글은 졸렬하니 차마 펜을들 수 조차 없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고백하자면 편지를 쓰는 데 드는 잉크보다 눈물방울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당신을 그립니다. 난 당신이 참 작다고 생각했었고, 내 욕심에 비춰 가난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본 당신의 모습에서 드러나지 않은 거대함을 보고는 생각을 고쳤습니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저 세상에 내어만 놓았어도 큰 은혜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큰 네가지 은혜중 천지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가 같은 항렬에 놓이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입니다. 내게는 하늘과 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큰 사람입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모르듯, 제 아들도 저를 모를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알아가듯, 제 아들도 저를 알아갈 것입니다.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게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고 좀 더 큰 사람이 되고 나서, 또 어떻게 당신을 바라보고 알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당신은 내 아버지이고, 나는 영원히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이제 그만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한 마디로 뱉고,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족한 만큼 말은 길어지지만, 모자라도 좋으니 이렇게나마 쓰고 싶습니다.
날은 차고 밤은 깁니다. 아늑하지만, 아들이 사지(死地)에 있기에 결코 편치 못한 잠자리에 들었을 당신을 떠올리며 남자가 흘리지 말야아 할 무엇을 전투복 소매로 훔쳐봅니다. 못난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쨌든 난 당신의 아들입니다. 멀지 않은 날에 환하게 웃으며 돌아온 아들을 맞아줄 당신을 떠올리며 글을 줄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듯이.
-玄雨 (05.9.14)
